8/30/2023 수요일
본문: 디모데전서 1:1-11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디모데에게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알려주고 정확한 복음의 교리를 에베소 성도들에게 가르치며,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관해서 편지를 썻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바른 교훈을 가르칠 것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고 싶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다른 교훈에 대해서 알리고 경계하게 하도록 이 편지를 썼습니다.
(1-2) 바울의 인사말입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이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도 된 것이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삶의 소망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가진 자신의 사도성은 자신이 좋아서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신의 교회를 핍박하던 삶에서 자신을 건져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계시로 된 것이며 (갈라디아서 1장), 사람의 전통이나 사람을 따라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어떤 어려움이나 목숨의 위험이 닥친다고 해서 이 사도권을 거부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소개할 때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에게 이끈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믿음의 신앙을 이어 받았다) 바울이 그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담하면서 젊은 디모데에게 기름부어 (디모데후서 1:6) 자신의 동역자를 삼고 그만큼 복음과 사역에 있어서 신뢰를 한다는 표현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자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에게 복음의 핵심인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4)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은 에베소에 있는 어떤 이들이 다른 교훈을 증거하는 것을 못하게 하며 오히려 바른 교훈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말하는 것은 신화, 끝없는 족보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이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신화와 족보가 명확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화라는 말은 허구와 거짓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적 진실에 기반한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거짓에 신앙을 쌓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신화를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배경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즉 영지주의가 가진 이원론dualism 과 비밀 지식, 참된 지식 (영은 좋은 것이고, 육은 안 좋은 것. 그래서 육안에 갇혀있는 영을 참된 지식으로 해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가현설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기에 육신으로 이 땅에 거할 수 없고 나타난 것 뿐이라는 주장)과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헤치기 때문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또한 족보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전통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 율법을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구원의 요소들인 믿음과 구원의 은혜에 대한 부분이 약화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역할이 명확해 지지 않기 때문에 족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의미 없는 변론으로 귀결된다고 하는 것입니다(William D. Mounce, Pastoral Epistles, vol. 46, Word Biblical Commentary, lxix).
(5-11) 바울은 참된 교훈의 목적은 다툼이나 비판 정죄가 아닌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복음 안에서 바른교훈으로 서로를 세워가기 위해 대화를 이뤄가길 바란 것입니다. 이 사랑은 깨끗한 마음 (자기 만을 위한 이기적이거나, 악한 의도가 아니라 선한 의도로 나온 마음)과 선한 양심 (순수하고 고결하고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의 근거가 되는 양심, 누가 보지 않아도 옳다고 여기고 행하는 삶, 신독의 자세)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 (오직 구원이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은혜를 간구하고 그 능력을 믿는 신뢰)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순수한 동기 (사랑,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출발하지 않고 의미 없는 말로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지향하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깨끗한 마음과 바른 도덕적 양심이 없으면 율법을 이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이 율법 선생이 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용도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죽이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선한 자들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들… 율법의 계명들이 금지하는 것은 살인, 도둑질, 간음, 비방, 탐심 등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그 일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말로만 떠든다고, 나는 율법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역할이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한계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서는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가르쳤던 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생각이 잘못 된 것임을 알리면서, 율법이 필요한 것은 이 죄를 짓는 자들이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생각하는 점: 율법에 묶인 자는 자기의 죄인 됨만 발견하기에 그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기에 더 나아가서, 율법으로 할 수 없는 의의 성취를 얻기 위해서, 즉 각 사람이 가진 죄와 연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다른 교훈은 우리의 능력으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이룰 수 있다고 거짓으로 속입니다. 그러나 바른교훈은 우리에게 율법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를 율법을 통해 깨달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가운데 베풀어 주신 그 의로움을 얻기 위해 나아가게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의가 지금도 우리를 의로움과 성화를 살아가게 하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암송: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1:5)
· 기도: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서로 나누는 성도들 되기를 (2) 수요예배와 찬양팀과 기도회를 위해서 (교회, 스테이트 칼리지 지역의 복음화, 가을학기에 들어오는 새가족을 위해서) (3) 교회의 환우들이 속히 회복될 수 있도록 (4) 전쟁과 자연 재난과 그 속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