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0/2023 목요일
· 본문: 누가복음 5:27–39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서서 예수님은 문둥 병자와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며, 부정한 것을 거룩으로 변화 시키시고 부족한 것을 완전함으로, 소외된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 받는 세리인 레위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구원 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27-29) 예수님은 세리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곳에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였습니다.
당시에 세리의 직업을 가진 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에서 세금을 걷어서 위의 지배층에게 갖다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정해진 세금만을 걷은 것이 아니라, 로마에 줄 세금 (직접세인 수입에 관한 세금, 간접세인 통행세 등), 분봉왕에게 낼 세금 등 원래의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걷음으로 동족의 아픔을 배가 시킨 일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을 참조하면, 같은 세리였던 삭개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며, 자기가 잘못한 자에게 4배로 갚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많은 재산을 착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레위가 예수를 만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다고 기록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레위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나고 전적으로 회개하며, 자신의 잘못된 일들을 깨닫고 자기가 잘못된 방식으로 착취했던 돈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을 초대하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30-32)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내려와서 예수의 말과 행동들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5:17). 그래서,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느냐?”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사처럼 건강한 자를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아픈 사람, 즉 죄인을 치료하셔서 의인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가 의인의 삶을 살고 있었기에 세리들처럼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고 생각했던 자들이었기에 구원의 필요성도, 거룩해 질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더 큰 문제였지만 그들은 그 위기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죄의 모습에만 쫓겨서 세리와 같은 자들의 잘못과 죄에만 눈길을 둔 것입니다. 그들 속의 영적인 죄, 교만의 죄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인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과 회개가 그들에게 더욱 더 필요한 것은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죄인인 것입니다.
(33-35) 그러면서 계속 따지기를 왜 예수님은 오셔서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의 제자들 처럼 금식과 기도하지 않는가?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참된 경건과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종교적 행위에 초점이 맞춰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금식과 기도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행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금식과 기도를 당장 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금식은 문제에 대해서 갈급함으로 하나님께 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며, 기도도 마찬가지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의 답이신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과 기도가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신랑의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신랑이 같이 있는 동안 기쁨의 축제가 이어지고, 그를 빼앗길 때에는 그때에는 슬픔으로 금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는 그 삶이 축제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이유는 이 축제의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축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죄의 간격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되어서 나오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게 있는 동안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해야 하나요? 그들의 삶이 축제의 삶으로 늘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들이 슬퍼할 시간은 이 축제를 베푸시며,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을 빼앗길 그 때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금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5).
(36-39)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드시며 시대의 변화에 맞는 양식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따르는 방식과 (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추구하는 방식), 예수님 자신이 오셔서 그를 통해 이뤄지는 방식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 다르며 같이 공존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새 옷과 낡은 옷을 같이 붙여서 쓸수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같이 넣을 수 없다. 각각의 성질과 용도에 따라서 사용해야 하는데,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개를 같이 놓으면 한 쪽을 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 포도주요,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래된 포도주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오래된 것을좋아하는 자들 (바리새인들은)은 여전히 과거의 것이 새로운 것보다 좋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39). 그러기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인들이 새로운 시대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 생각하는 점: 예수님은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심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되는가에 대한 새로운 방식), 과거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시면서 이 비유를 든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가장 좋은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리인 레위가 예수님께 발견한 것은 자신이 돈으로 얻을 수 없는 무언가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삼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레위는 이것이 자신이 가진 것보다 훨씬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의 잘못된 길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옛 삶의 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 삶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의 삶의 목적이었던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세리라는 직도 내려놓고 주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죄사함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 암송: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 기도: (1) 복음의 가장 귀한 가치를 더욱 분명히 알아 갈 수 있기를 (2) 7/21-23 기간의 중고등부 수련회의안전과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할 수 있기를 위해 (3) 각 구역과 구역장, 교회 제직들과 가을 학기에 들어올 새가족들을 위하여 (4) 지금도 세계 각 처소에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계신 권종승, 김정호, 안지현 선교사님과 심수영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