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2023 목요일
· 본문: 고린도후서 2:5-11 (근심케 한 자를 용서하라)
(5-7) 고린도 교회에 바울의 사역을 반대하고 그를 괴롭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의 맴버인지 아니면 그곳을 방문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행위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할 정도의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6),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를 용서하고 그를 그 근심에서 건져 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행할 행동이라고 교훈합니다 (7)
물론 그는 단지 바울만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많은 성도들을 힘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전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가지 못하였고, 또 가서도 크게 환영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짐작을 해보면,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의 사도성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유는 그가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지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도인가?라는 부분과 다른 이유는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있던 자들의 논리, 즉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말과 다르게 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런 힘든 삶이 있느냐? 바울이 정말 사도가 맞느냐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 고린도후서를 계속 묵상하면서 살펴보겠지만 미리 간략하게 말씀 정리하면, 고린도후서 3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자신은 어떤 “천거서, 추천서”가 없이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일과,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삶 전체에 대한 결과가 고린도 교인인,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하는 것이 인간의 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된 일이며, 그것의 증명이 이 복음의 메세지를 전해 듣고 삶이 바뀌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고린도 교인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나 향기로 바울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그리고 영의 새 직분의 영광에 대해서 단지 율법의 기준으로 이 영적인 영광을 비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은 자신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복음을 받는 자들을 위한 고난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 복음은 복음이 아니겠지만, 바울은 자신은 그 복음의 풍요를 경험하고 스스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진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도인지를 고린도후서 3-12장에서 증명하는 것입니다.
(8-11) 어떻게 용서하고 위로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들이 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8). 사랑함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그의 영혼을 악으로부터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복음에 대해서 바르게 깨달았는지를 확인해 보면서동시에, 자신이 가르친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지를 확인하기를 바랬습니다 (9).
그리고 그 용서하는 일이 바울 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정말 필요한 일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자신을 반대하고 힘들게 했던 자를 용서하는 행위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일이 개인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 앞에서 너희 공동체가 계속 해서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죄가 틈타지 않는 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해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탄에게 공동체가 속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분열의 틈바구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틈을 파고 들어서 그 간격을 더욱 더 크게 늘리게 하는데 자기 전부를 건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하게 죄가 없는 가운데 있다면 사탄이 사이에 껴 있을 틈도, 그곳에서는 자신의 힘을 발휘할 방법이 없어서, 사탄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짓과 불경건함, 미움과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틈이 있다면, 사탄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더욱 크게 벌려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욱 멀리 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멀면 멀어 질수록 사탄의 권모 술수는 더욱 강력해 지고 우리는 사탄의 손 아귀에 놀아납니다. 그것은 사탄이 거짓말로 우리를 자신이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거짓이 거짓을 유발하고 죽음으로 이끈 다고 하는 것처럼, 그 조그마한 틈 때문에 하나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고, 미움이 싹트고, 사랑과 이해는 사라지고 서로를 적대하는 마음만 상처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 생각하는 점: 죄를 진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2:6에서 말하듯이 벌 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성도)을 직접 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벌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진리를 기준으로 무엇이 복음의 삶에서 벗어났는지를 사랑으로 권면하고, 진심으로 그가 깨닫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용서하고 그와 화목하도록 노력하고, 그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는 것이 우리가 순종으로 행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9, 신명기 32:35). 이것이 기독교인의 용서의 행위입니다.
용서하는 그 행위와 삶이 그가 기독교인 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서의 행위는 자신이 용서를 받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죄에서 구해내시고, 의롭다 하시고 자신의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를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이 은혜의 경험이 있는 자만이 용서의 의미를 알고 행할 수 있습니다. 아직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싫다면, 하나님께 조금 더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란 것을 다시 기억하고 알게 되면, 진정으로 하나님의은혜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닌 죄인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 암송: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썻노라” (고린도후서 2:8-9)
· 기도: (1)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용서함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성도가 되기를 위해서 (2) 사랑과 용서함을 통해서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에 사탄이 틈타지 않기를 위해서 (3) 지금도 세계 각 처소에서복음을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저희 교회가 후원하고 계신 권종승, 김정호, 안지현 선교사님과 심수영목사님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