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2023 화요일
· 본문: 고린도후서 10:7-18 (복음과 삶의 평가 기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비평과 거짓 문제제기를 거론하고 그에 대해서 자신의 사도권과 권위를 변호하며, 사도에 대한 기준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7-11, 사도권 변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여전히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심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도 바울의 사도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 왔습니다 (7). 1절과 4절에서 나오듯이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부드럽게 대하고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그가 복음에 대해서 담대하지 못했다고 비방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드러나는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도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들에 대해서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사도권을 바로 세우며, 그들이 바라보는 사도에 대한 잣대, 기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 보다도 작거나 연약하거나 권세가 약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7절에서 그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알면 나 또한 그렇지 않겠냐?”라고 스스로 자문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말씀하듯이 바울이 주님이 주신 권세 중에서 사랑이 아닌 공의의 권세로서 그들을 대하였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을 엄하게 대하였다면 교회에는 더욱 힘든 일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엄하게 쓴 편지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이전에 표현 했었고, 다행히 이 근심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로 이끌었기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권세는 철저히 십자가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그 십자가의 섬김과 낮아짐으로 이들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를 따라 살아온 삶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9-11) 바울은 충분히 편지에서 엄하게 다루듯이 그들을 대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생각하듯이 말과 언변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배경을 본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 지식과 논리가 뛰어 난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음을 봅니다 (고전 1:30…). 그들은 바울이 철학적 사변과 논리로서 자신들을 설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이런 사변적인 화술이 있어야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고, 학식이나 권세가 있어 보이는데, 바울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이 있었지만, 그렇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자가의삶 만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글, 편지에는 그들이 생각하던 그런 논리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이성적인 면이 뛰어남이 들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글로 보여지는 바울과 자신들에게 삶으로 보여지는 바울이 서로 다른 것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편지로 쓰는 자신이나 함께 있어서 말하고 행동하는 내 자신이 동일한 자요 둘 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행하는 사람인 것을 말하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12-14, 자랑에 대한 바른 기준) 그리고, 자신들의 복음의 권세, 사도권에 문제를 제기하는 고린도 인들에게 자문하기를 바라며, “어떻게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칭찬하는 칭찬이 진정 의미가 있는것인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 복음을 반대하던 자들은 스스로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떠들며, 추천서를 들고 와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의 삶으로 기준으로 삶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높이면서 지혜롭게 잘 판단한 것처럼 말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렇게, 삶의 증거 없이 말로만, 추천서로 만 자신을 높이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들과 자신을 비교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의 천거서도 제출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삶 만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보일 분이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바울의 사도성을 증거하는, 복음의 삶에 대한 객관적인 잣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13-14) 거기다가 바울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범위의 한계에 속해 있었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증인이시고, 하나님이 말씀과 명령이 자신의 삶을 붙잡았고, 그 뜻에 따라서 고린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했고 그들에게 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음을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부족함도 넘침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법도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행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자신의 사도적 삶의 기준이 자신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자들처럼 자기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복음에만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5-18, 주 안에서만 자랑함) 15절의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행하며 어떤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즉 누구를 비교해서 자신의 사역이 더 낳다던가 부족하던가 하는 평가를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위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만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더욱 믿음이 자라며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의 모습들 왜 온유하며 유순하게 관용으로 대했는지를 알고 그런 삶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바른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기초를 놓는 것이 바울과 동역자들에게 중요한 문제 였습니다. 그래야 이 복음의기초가 흔들리지 않고 고린도 지역을 넘어서 영원토록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은, 주의 진리대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17). 옳고 그름의 기준을 주님의 복음, 하나님의 틀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만이 진리이고 진리만이 어느 곳에서나 옳다고 인정 받고 주 앞에서 칭찬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
· 생각하는 점: 성도로서의 나의 삶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진리인가요 아니면 여전히 다른 사람이나 스스로가 세운 잣대가 되는가요?”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 중에 영원히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행한 것, 즉 진리의 삶 만 남습니다. 오직 진리만 남는다. “그리스어로 진실의 반대말은 허위나 거짓이 아닌 망각忘却이라고 합니다. 거짓된 것은 망각 속에 다 묻히고, 살아남는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란 뜻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어령, 80년 생각).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진리 가운데 행해지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아름다움과 공의, 그리고 한 생명이 세워지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암송: “그러니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고린도후서 10:13)
· 기도: (1) 우리의 삶의 기준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되고, 주님의 진리 위에 세워지기를 위해서 (2) 영육간에 고난과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위해서, 특별히 병중에서 치유와 회복 가운데 있는 환우들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쁨이 넘칠 수 있도록 (3)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의 성품으로 자라나는 교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