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2023 금요일
· 본문: 고린도후서 12:1-10 (연약함의 은혜)
본문은 바울이 경험한 계시에 대한 내용과 개인적인 연약함과 약점,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충분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6) 바울 서신에서 자신이 환상과 계시를 경험한 것을 말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이 일이 자신의 복음과 깊은 연관이 있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면 바울은 이 일을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바울에게 복음의 진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은 환상과 계시를 말하는 것이 그렇게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인 체험은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개인의 사건이요,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드러나고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경험한 자신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 자신의복음 사역과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자신이 이런 어리석음을 드러내야만 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외모지상주의가 강했음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바울의 계시와 환상에 관한 고백들을 이해 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영적인 체험을 사도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아서 바울은 원치 않지만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때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음을, 2절의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놓고 “내가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경험을 할 때 이미 14년 전에 있던 일이었고,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의 환상 속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2-3). 바울은 이 환상 속에서 셋째 하늘인 낙원에 까지 이끌려 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셋째 하늘은 주님과 성도들이 거하는 장소이며,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신 낙원으로 이해 됩니다 (누가복음 23:43). 히브리 묵시서인 에녹2서 5:1에는 낙원이 죽은 이들의 고향으로 명시됩니다. 살아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영적인 존재들이 가있는 곳에 거하다 왔으니 얼마나 대단한 경험입니까… 그러나 바울 자신이 이 일을 그렇게 자랑하고 싶지 않음을 또한 고백합니다 (5). 오히려 그에게는 자신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일을 하기에 약함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7-10) 바울은 자신이 입으로 자랑을 하지는 않지만, 여러 계시를 받았고 성령의 역사를 많이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에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새 생명이 만들어 졌고, 새로운 인류로서,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구분이 없고, 남자나 여자, 자유자나 종이라는 종교적, 인종적 사회적 모든 신분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새 인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23-29; 에베소서 3:6-7). 이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복음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이 받은 여러 계시의 의미가 너무 큰 것이기에 그에 따른 아픔, 가시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아픔이었고 복음을 증거하는 자신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사단의 가시”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유혹, 계속 바울을 괴롭혔던 대적자들, 만성적인 질환 (망막염, 말라리아, 편두통 및 간질), 그리고 언어 장애”까지 다양합니다 (이런 가능성 중에서 육체의 가시라고 하는 부분이 갈라디아서 4장14-16절을 참고로 해서 눈과 관계된 질병이라는 해석이 조금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질병이든지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육신의 가시로 불리는 자신의 아픔과 한계가 자신을 제한하는 어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깨우는 일로, 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일로 작용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닌 이 육체의 가시는 사단이 주었다고 말하듯이 자신의 복음 사역에 여러 방해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이것을 없애 달라고 세 번 기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시며 바울의 능력이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사단이 주었던 것이라고 생각한 가시였는데, 이 연약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온전함을 기뻐할 수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온전함, 능력 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신을 높이는 일이라면 그 일은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학력, 지위, 집안, 머리 좋은, 부유함 등이 자신을 높이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음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 생각하는 점: 하나, 기도의 응답에 관하여. 바울이 간구한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는 세 번의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만 바울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았을 뿐, 바울은 분명히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시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는 도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생에서 육체적인 치유나 영적인 권능이라는 면에서 반드시 치유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10절에서 고백하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자신이 당한 모욕과 가난과 고난과 여러 동족과 이방인들에게 받은 박해와 어려움을 더욱 기뻐하는 것은 그 안에서참된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바르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 영적인 체험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나요? 우리의 높음을 자랑하나요 우리의 낮아짐을 자랑하나요? 아니면 영적인 체험을, 아니면 복음 때문에 겪는 고난을 자랑하나요?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관계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신앙에 굉장히 큰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들이 우리 삶에서 역사하기를 바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역사와 계시가 자신의 자랑이 되고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 자랑이 어리석은 자랑일 수 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자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와의 관계이며, 하나님 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사단의 가시라고 할 만큼 견디기 힘든 연약해진 육체의 약함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 암송: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10)
· 기도: (1) 우리의 삶에서 육체의 가시를 주심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알기를 (2)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계시나 환상 등 성령의 다양한 역사들에 감사하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들이 되기를 위해서 (3)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위해서 (4) 스테이트 칼리지 지역의 복음화와 팬 스테이트 대학의 복음화를 위해서 깨어서 기도하게 해 주시고 각자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