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2023 목요일
· 본문: 누가복음 7:1–10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냅니다.
예수님께서 평지 설교 (마태복음에서는 산에서 말씀을 나눴다고 산상수훈이라하고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나눴다고 평지 설교라고 합니다)를 통해서 제자로서의 삶 (사랑하며 비판하지 말고, 자신의 죄와 교만에 대해서 더 깊이 성찰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진리 가운데 바르게 서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래의 사역 터전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개의 놀라운 이적을 행하십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적에 관한 것입니다.
(1-5) 첫번째 이적은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진실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고, 그 소식을 들었던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는 그 모습을 안타까워 하면서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에게 부탁하여 예수님께 그 종을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간구를 들은 유대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부탁하여 예수님께서 종을 고치기 위하여 백부장의 집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백부장의 믿음의 태도를 보시며 놀라시며,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어떤 모습이 그가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인지 살펴 본다면, 먼저,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다”는 말에는 이 두 가지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이민족으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나누는 회당을 짓는 것을 기뻐했고, 지배계층 사람으로 피지배 계층인 유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부하나 종 또한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약자, 힘이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 이것이 그의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6-10) 두 번째로, 백부장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결코 내색함 없이 자기 아래 사람을 위해 겸손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부탁하는 그 모습이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6절에 보면 유대의 점령군의 지휘관으로 명령이나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서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예수를 데려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겸손한 한 사람으로 예수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 심지어 자신을 예수님 보다도 훨씬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6절) 혹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7절), 그리고 자신이 명령하듯이 예수님이 명령만 하신다면 그 사랑하는 종이 낫을 것이라는 8절의그 고백이 그의 놀라운 믿음을 보여 줍니다.
이 순간에 그는 예수님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완전히 연약한 인간으로 서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연약한 죄인처럼, 백부장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의 입술의 명령 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하에게 명령을 하듯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만 하셔도 된다는 그의 말에는 자신이 이미 예수님의 종이나 하인과 같은 위치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지위나 사회적 군사적 힘은 아무 의미 없음을 백부장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오로지 예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 만을 구하는 겸손한 삶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의 믿음의 놀라움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세”에서 보여집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치시는 능력과 그의 신성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만 하신다면, 그 말씀에 그 만한 능력이 있음을 그가 입술로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 놓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감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분으로높이며 말하는 그의 삶의 태도입니다. 얼마나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삶의 모습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유월절에 있던 손 마른 자를 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화를 내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과 지금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백부장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요? 심지어 그는 예수님이 오시든 안 오시든 그의 말씀 만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최고의 예를 다하여서 예수님을 존중하려는 그 모습은 예수님의 태도를 관찰하며 잘못을 찾으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과 너무도 다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알고 계셨던 주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 (9). 전 이스라엘의 믿음을 다 훑어 보아도 이 이방인이 소유한 그러한 믿음을 찾을 수 없다니, 얼마나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보배 같은 존재로 여김 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수치인가…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리러 가시는 하나님을 막아서며 “그 땅에 의인 10명이 있으면그 곳을 무너뜨리지 않겠다”라는 그 약속을 받았지만 결국 그 의인 10명을 찾지 못해서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지지 않았는가… 어쩌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그런 노력을 하면서도 이스라엘에는 어떤 희망을 찾지 못하는 때에, 이 구원의 역사 밖에 있는 이방인 한 사람에게서 그가 가진 이 순고한 믿음 속에서 그 희망의 불꽃을 보신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어느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어떤 배경과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믿음이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능력을 끌어 내려 사용케 됨을 봅니다.
· 생각하는 점: 믿음이 하나님의 마을을 움직이고 그의 능력을 이끌어 냅니다. 믿음을 사용함에는 인종도, 사회적 지위도, 군사적 힘도 경제적 능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진실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신뢰만이 필요합니다. 수 많은 시간 동안 금식과 기도를 일삼았던 유대 종교인들에게서 그 믿음을 찾을 수 없었고, 이방인이며 약속과도 상관없던 백부장에게서 그 믿음이 발휘 되었습니다. 약속이 주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고 내가 붙들고 살아가느냐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 쓸 수 있느냐의 중요한 문제임을 다시 한번 봅니다. “주여 수고 하지 마옵소서… 말로 만 하옵소서… 명하기만 하옵소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 신앙의 고백이 우리 삶 가운데 진정으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의 능력을 위해, 오늘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며 우리 안의 성령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위해 구별된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 암송: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누가복음 7:7)
· 기도: (1) 이웃의 아픔에 적극 참여하며 백부장과 같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위해서 (2) 각구역과 구역장, 교회 제직들과 가을 학기에 들어올 새가족들을 위하여 (3) 신앙을 갖지 못한 가족, 친지, 친구들을 위하여 (4) 지금도 세계 각 처소에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계신 권종승, 김정호, 안지현 선교사님과 심수영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