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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23 (렘 6:1-30)

4/25. 화요일
· 본문: 6:1-30
6장에서도 예레미야의 계속되는 예루살렘 명망에 대한 예언들이 이어집니다.

(1-8) 예루살렘 성이 어떻게 포위되고 멸망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전쟁은 이 아름다운 성 예루살렘 주변의 성읍들인 베냐민, 드고아, 벧학게렘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침공을 경고하는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바벨론 사람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양떼처럼 몰려와서, 아름다운 성 주변에 진을 치고, 밤에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공성전 가운데 성을 허물기 위해서 약한 쪽에 나무 방벽을 만드는 것까지… 그 성을 허물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예루살렘에 징계를 행하시는 것은 한 가지 목표였습니다. 예루살렘아, 훈계를 받으라 (8).

(9-15) 바벨론은 악독이 가득한 예루살렘에 침범하여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잡아 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임박한 환란 가운데에도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탐욕 가운데, 거짓을 말하며 “평강하다 평강하다”를 외치기 때문입니다.

(16-21) 하나님은 이 악독한 죄악에 물든 예루살렘에 회복의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선한 길로 가라. 그러면 심령이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고 선한 길, 즉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번제와 희생제물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22-30) 그 결과, 북방 바벨론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사방이 원수의 칼이 되어, 아름다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이 어려움 가운데, 사람들은 외아들을 잃은 아픔을느끼면서, 풀무불에서 다 타 없어지는 재난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루살렘이 훼파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절에서 예루살렘을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장소가 전쟁의 장소 피와 죽음의 장소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율법이 흘러나와 사람들 사이에 공의와 사랑이 넘쳐야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사가 드려지며, 하나님과 인간들의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는 향기로운 제사가 시행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공의가 선포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탐욕에 가득차서 행하며, 선지자와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하는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 죄악의 뿌리에 탐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탐욕은 언제나 정해진 경계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더 가지려는 그 마음에, 내 것이 아닌 것에 눈이 가고 그것을손에 움켜쥐고, 남의 것을 빼았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에게 이들을 넘기는 이유는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에 손을댄 것에 대한 벌입니다. 바벨론에게 자기들의 것을 빼앗김으로서 탐욕으로 일궜던 것들이 안전한 것이 아니고,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하는 그 욕심의 토대에 쌓아 놓은 것들이 빼앗기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넘치는 죄악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심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악에서 돌아오도록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16절에서 말씀하시듯,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확인해서, 과거에 선조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살펴보고, 또 파수군의 나팔소리를 듣듯이, 이 모든 경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따라 살아가라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길로 떠났습니다.

· 생각하는 점: 종교의 리더들이면, 사회의 도덕의 기준이며 잣대인데, 이들이 탐욕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일을 했으니, 사회의 소외 받는 자들, 힘 없는 자들이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회의 최종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종교인들인데, 그들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 사회에는 서로에 대한신의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사회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아픔에 무감각 했습니다. 이들은 무감각할 뿐 아니라, 부끄러움도 없고 수치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무너져 내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거나,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같은 인간이 가진 본성인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고, 그들이 당할 고통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취급한 것입니다. 14절에서 보시면 “내 백성”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회에서는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 자신이 돌보시는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안다고하는 사람들인, 제사장들, 선지자들은, 그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들의 동료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죄만 남은 그곳에 예루살렘이 존재해야 하는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이들이 드리는 거짓된 마음의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의 존재 의미는 그곳에 성전이 있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며 백성들의 제사를 통해서 죄가 회복되며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약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지 않는 그곳에 제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입으로 죄를 회개하고 제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 제사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의미 없는 행위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더 이상 계셔야 할 이유도 없고, 예루살렘은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 암송: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예레미야 6:19)

· 기도: (1)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허울뿐인 예배의 행위가 아닌,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에 대해 사랑과 관심을 갖기를 위해서 (2)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돌봄과 배려로 드러날 수 있기를 (3) 몸의 회복과 치유 가운데 있는 교우들이 속히 회복되며 그 과정 중에 마음의 평화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더해 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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