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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23 (고후 11:16-33) 무엇을 자랑하는가?

6/22/2023 목요일

· 본문: 고린도후서 11:16-33 (무엇을 자랑하는가?)

본문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겪었던 고난과 시험에 대해서 세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랑을 하는것이 어리석은 일인지 잘 알고 있던 바울이 이렇게 해서라도 그들 안의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만 했던 속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보여줍니다.

(16-18)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정말 부끄럽게 여기는 바울이었지만, 아마도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이렇게 자신의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고 어리석게 여긴다고 하면서도 기록하는 곳은 이곳과 빌립보서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에 행했던 과거의 행악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과 고통을 당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늘 인정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그 수많은 잘못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자신을 복음의 사도록 삼아 주신 것 뿐 아니라 이제까지 행해 왔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의미 없는 일인지 잘 알지만, 현재의 고린도 교회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바울의 사도권 주장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연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를 신중하고 중요하게 다뤄야만 했습니다.

(19-21)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진 자는 그 자체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지혜로 이끌고, 어두운 곳에서 빛을 비춰주며, 무질서에서 질서를 가져다 주며,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복음의 진리 가운데 있기에 지혜로운 자들이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지혜를 준다는 것은 자신들을 옭아 매는 것에서 자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인데, 이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들을 받아들여서 종의 멍에를 매니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종으로 삼고, 자유를 빼앗고, 무례하게 대하고 무시하듯이 빰을 치듯하여도 그들을 인정하다니(20)… 바울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보다 어리석은 행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22-28) 당시에 바울의 복음을 반대했던 자들 중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주류였기에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았었는지 설명합니다. 너희가 “히브리인,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후손”을 거론하느냐? 내가 그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중의 성골 중의 성골이다라고 바울이 외치는 것입니다 (22). 왜 바울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듯 말할까요? 그것은 구세주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대리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유대인 사도가 아니라면 본질상 치명적인 결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폴 바네트, 고린도후서강해, 239).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주장하느냐?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으로 그리스도의 종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누가 얼마나 더욱 잘 따라 살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고통과 낮아짐의 의미, 섬김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기에 그 삶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교회의 덕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 된 삶을 살았는지를, 그 고난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 준 것입니다 (23-28). 복음을 위해서 밤낮으로 섬기고, 죄도 없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죽을 정도로 매맞고, 한 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을 맞고, 돌로 맞고, 배가 난파되어서 죽을 뻔하고, 그 외에도 복음을 증거하러 다닌 모든 길들은 늘 험난 한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늘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육신을 따라서 자랑했습니다. 바울 시대의 고린도 지역에서는 여전히 헬라-로마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생에서의 영광과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황제를 비롯하여 군인들 시민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 기념비를 만들거나 공공 건물, 혹은 가족 벽화, 또는 서사실에 실명으로 기록해 놓기도 했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 또한 이런 문화에 영향을 받아 거짓 사도들을 더욱 높이는 이유가 그들이 보여준 외적인 자랑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의 복음과 사도권을 지키기 위해서 바울도 자신을 높이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자랑은 세상 사람들의 자랑과 다른 결의 자랑이었습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자랑이 이스라엘의 가문과 율법과 언약에 속한 자신의 지위와 위치에 대한 자랑이었다면 복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복음을 위해 진 십자가를 통한 고통과 자신의 약함에 대한 자랑이었습니다.

특별히 28절의 바울이 교회를 향한 이 안타까운 마음,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도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서 받는 고통을 즐겁게 받아 들였고, 교회가 거룩해져가고 성화를 이뤄 가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짊어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실로 어두운 밤 하늘에 길을 비춰주는 등대의 불빛처럼 교회가 나아갈 길을 비추며 전진해 나갔습니다.

(29-33) 그리고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삶에서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성벽을 타고 내려갔던 일을 (사도행전 9:23-25 참고) 자랑합니다. 이런 일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상상도 못할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로마 군인의 가장 영광스러운 무공인 Corona muralis 는 포위하고 있는 도시 성벽을 첫 번째로 넘어간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어리석은 자로서 바울은 도망자로 성벽을 ‘내려간’ 것을 복음을 위한 자신의 자랑으로 삼은 것입니다 (폴 바네트, 240).

· 생각하는 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세상의 기준과 다른 기준으로 자랑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자기가 뛰어난 것, 그 성취를 높게 평가합니다. 물론 이것은 늘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정당한 땀의댓가로 얻은 것은 칭찬받고 본 받을 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이고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렇게 큰 의미가 주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되려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얼마나 내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는지(사적인 마인드에서 공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사용했는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서 사용했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되고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일에 사용되었다면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할 만큼 창피한 일 조차도, 용기 없어 보이는 일 비겁한 일 조차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힘든 고통과 고난 조차도,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고, 기쁨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안에 그리스도의 강함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 난다면,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자랑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와 부활이며, 한 생명의 소생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 암송: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30)

· 기도: (1)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나고 하나님의뜻이 드러나는 것으로 기쁨을 삶게 하시길 (2) 복음의 길을 가고 있는 동안 고난과 어려움을 직면했다면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기를 위해서 (3) 지금도 세계 각 처소에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저희 교회가 후원하고 계신 권종승, 김정호, 안지현 선교사님과 심수영목사님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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