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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23 (삼하 6:1-23) 내용과 형식 모두 중요하다

7/5/2023 수요일

· 본문: 사무엘하 6:1-23 (내용과 형식 모두 중요하다)

(1-10) 다윗이 블레셋을 두 차례 이김으로 다윗 왕국이 안정을 찾아가고 예루살렘이 정치적인 수도로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제 막 통합된 이스라엘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거의 이스라엘에서 잊혀져 가듯 존재했던 여호와의 궤를 찾아 오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에 의해서 여호와의 궤를 빼앗긴지 거의 100년이란 시간 동안, 여호와의 궤는 성막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11). 여호와의 궤는 2절에 기록한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고, 그 안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기록인 십계명 두 돌판이 들어있으며, 그 궤가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이며 (출애굽기 25:22, 민수기 7:89), 실제적으로 여호와의 보좌입니다 (사무엘상 4:4, 열왕기하 19:15, 시편 80:1). 그렇기에 여호와의 궤를 적군의 손에서 되찾아 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 뿐 아니라,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삼만이라는 군대를 동원한 것은 그런 마음의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다윗은 삼만의 군사를 통해 바알레 유다 지역에서 한 번 더 블레셋에 승리하고 하나님의 궤를 되찾아서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모시고 오기 위해서 다양한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며 가지고 나오는데, 여호와의 궤를 실은 소들은 놀라서 뛰며 궤가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궤에 손을 댄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여호와가 진노하셨고 웃사를 그 자리에서 치셔서 죽게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자리의 이름을 “베레스 웃사” 즉, 웃사를 친 곳이라고 불렀습니다(8). 그리고 다윗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이 아닌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셔 놓았습니다 (10).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오는 데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지 않은 것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5장과민수기 3장에 따르면, 언약궤의 운반은 수레에 실어 운반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인 중에 고핫 자손이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고 옮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 25:14; 민 3:30-31). 그런데 웃사와 아효가 언약궤를 맨 것이 아닌 소의 수레에 실어서 옮김으로, 여호와의 규례를 어기게 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입니다.

(11-23) 여호와의 궤로 인해서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윗의 예상과는 다르게 언약궤를 모신 오벧에돔과 그 집이 복을 받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다윗은 다시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기로 계획하고 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성으로 가지고 옵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춤을 추며, 온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의 소리로 환호하며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환영합니다 (11-15).

그런데 이 기쁨의 장면 가운데에서 오직 미갈 만이 여호와의 궤가 자신들의 삶의 가장 중심부에 들어오는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하고, 다윗이 왕으로서 점잖게 있지 않고 춤을 추며 뛰노는 모습에 그를 업신 여기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도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자신의 성에 들어와서 장막 가운데 놓여 있는 그 자체가 너무 기뻐서 번제와 화목제로 축하하고, 모든 백성과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함께 함을 보게 됩니다 (18-19).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자신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이 앞서 보인 언약궤 앞에서 보인 행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윗은 언약궤로 인해서 기분 좋게 축복하러 들어왔는데, 자신이 기뻐 행한 일로 핀잔을 들은 것입니다. 이에 다윗의 답이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 (21).” 즉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왕인 것이 무슨 상관이냐, 나의 지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한 것 뿐이다. 또한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 (21).” 즉, “나의 지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능력으로 이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왕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은혜에 감사하며 뛰어 노는 것, 즐겁게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천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오직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면 되는 것이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2). 그리고 다윗은 그녀를 사울의 딸 미갈이 아닌 “계집종 אָמָה (ʾāmâ), female slave, maidservant”이라 부르는 데 그것은 자신을 비난한 것이 결국 여호와를 낮추고 무시한 일이 됨으로, “계집종”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딸 미갈이 무자식으로 인생이 마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23).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은 것과 다윗을 업신 여긴 것에 대한 처벌이며, 현실적으로는 사울의 후손이 더 이상 다윗 왕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생각하는 점: 여호와를 존중하는 것에는 마음(내용)과 형식이 다 중요합니다. 다윗의 마음에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오는 것은 너무 좋았고, 굉장히 많은 준비와 열정을 다했지만, 하나님이 웃사를 치신 것은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형식에 따른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의 기뻐하는 모습에서 왕으로의 형식과 모양을 문제로 삼아서 다윗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왕으로의 체면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기쁨(마음의 진정성, 내용)보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의 약속대로 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 자신의 왕의 지위나 모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백성들은 그 내면에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와 기쁨이 넘쳐 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마음의 표현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적인 규칙과 규율, 질서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내면의 기쁨과 외면의 모습이 서로 조화를 이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은 더욱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 암송: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사무엘하 6:21)

· 기도: (1) 하나님을 높이는 것에 마음 (내용)과 형식 (모습)을 다 갖추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하는 자들 될 수 있기를 (2)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며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인생 임에 감사할 수 있기를 (3) 수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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